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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놈놈-어른 흰눈 본문
첫째 유진이는 태어난 지 한 달만에 구조되어 나에게로 왔다. 둘째 동백이는 두 달 반만에 생에 겪을 모든 험한 꼴을 다 겪고 내게 왔다. 그들에게는 엄마가 없었고 돌봐줄 어른이 없었다. 무엇을 해도 되고 안 되는지 아무도 기준을 알려주지 않았다. 형제라도 있으면 의지하며 싸우다가 화해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터득했을 텐데 그마저도 없었다.
종일 혼자 지내다가 사람이 귀가하면 달려나와 반갑다고 쫓아다니며 뭐라뭐라 떠드는 유진이의 말소리가 들리면 이내 흰눈이 달려나왔다. 유진의 요구가 마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인 듯 말이다. 꼬리를 바짝 세우고 걸오는 모습만으로도 이미 좋아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거기에 더해 흰눈은 마치 유진을 부르듯, 내가 놀아주겠다고 대답하는 듯 작고 다정한 소리로 응답했다.
사람은 지들 언어가 최고라 동물 언어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잘 안한다. 유진이는 늘 원하는 게 있으면 못 알아먹는 인간에게 잔소리하듯 떠들고 짜증내고 그랬다. 그런 유진이를 유별스럽다고 생각했는데 흰눈이 유진이 말에 반응할 때마다 인간이 소홀했던 거라는 확인 사살 같아 뜨끔했다. 유진에게 처음으로 어른 고양이가 나타났다.

항상 자기가 짱이라고 생각하는 동백은 놀이에서도 자신이 우위를 점하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 그게 늘 유진과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어느날인가 부터 흰눈과 동백이 우다다 달리며 쫓고 쫓기는 놀이를 시작했다. 사람이 잠든 밤 시간에 주로 벌어지는 일이라 정확한 시점을 확인하지 못했다. 쫓고 쫓기는 놀이가 끝나면 바닥에 뒹굴며 서로의 손으로 얼굴, 머리를 잡아채려고 버둥거렸다. 놀이인데 항상 동백이 격해져서 흰눈을 제압하려 했고 그럴때면 흰눈이 놀이를 멈췄다. 놀이와 싸움을 구분하라는 뜻이다. 그럴 때 동백 표정이 귀엽다.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신의 의도가 싸움은 아니었다는 뜻을 비치려고 애쓴다. 진작에 저리 배웠다면 유진과 싸울 일도 없었을텐데.

사람하고만 살아서 사람이 보내는 신호에만 주의를 기울이니 고양이들 사이의 사회성 키우기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방법을 처음으로 보여준 게 흰눈이다. 생각해보면 흰눈은 엄격한 엄마로부터 삶의 많은 기술을 배웠고, 자매인 점순이와 같이 성장하며 고양이다운 놀이와 사냥법을 익혔다. 동네 고양이들 간의 서열 정리와 영역 지키는 방법까지 모르는 게 없는 고양이가 흰눈이다. 그런 흰눈의 눈에 유진과 동백이 얼마나 어리고 어리석게 보일까.
그런데 흰눈은 두 고양이를 어리게는 보지만 어리석게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실제 나이로도 두 고양이가 흰눈보다 어리긴 한데, 고양이들도 사람처럼 서로의 나이 차이를 인식하는 것 같긴 하다. 동백이 마구잡이로 놀다가도 흰눈이 선을 넘었다 싶으면 주의를 주는 차원에서 놀이를 일시 정지하는데 자기가 더 어른이라고 생각했다면 무시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백과 유진은 나이 차가 크지 않아 동백이 유진에게 많이 대들었기 때문이다. 흰눈은 동백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놀아주는 것을 봐서는 동백이 배움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동백이 사람과 잘 지내는 행동 방식을 보며 흰눈의 행동이 변화되는 것을 보았다. 어떤 면에서는 동백의 인간 친화적 행동을 존중하는 것 같기도 하다. 흰눈이 사람의 손길을 받아준 것은 전적으로 동백 덕분이다. 둘이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마다 내가 다가가 동백을 쓰다듬고 안아주는 모습을 흰눈이 지켜보면서 사람과의 접촉이 괜찮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다. 동백을 먼저 만지고 흰눈에게 다가가 코끝에 손가락을 대면 냄새를 맡은 후 살포시 고개를 숙인다. 머리를 만져도 된다는 흰눈의 신호다. 그럼 조심스럽게 정수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발전 해 지금은 머리를 지나 등을 쓸어내리며 엉덩이까지 손끝이 닿아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유진은 여전히 흰눈과 어울리길 원치 않는다. 사람에게 한 말을 듣고 흰눈이 찾아오면 ‘너한테 한 말 아니라고’ 하는 표정으로 도망쳤다. 그래도 매일 매일 흰눈은 유진에게 다가간다. 매번 거절 당하면서도 언제그랬냐는 듯이 또 먼저 다가간다. 여기서 흰눈이 어제의 일을 기억 못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동백이가 어제의 거부를 기억하지 못했다면 흰눈처럼 매일 유진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유진의 거부에 지친 동백은 급기야 화를 내고 유진의 자리를 빼앗고 지나가는 유진의 뒷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 하지는 않았을테니까. 흰눈 자체가 온순한 성격인 것 같다.

흰눈도 자신이 거부당한 것을 알지만 유진과 친해졌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아서일지도 모른다. 유진이 흰눈을 거부하며 자기 영역에 흰눈이 들어오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래서 유진의 주요한 영역인 동생의 방은 다른 고양이 금지 구역이다. 그런데 동생의 방은 가장 볕이 잘 드는 발코니가 있고 그 공간에 고양이 전용 쉼터가 마련되어 있어 모든 고양이들이 탐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유진이만 그 공간을 독점하기 때문에 더더욱 동백과 흰눈은 그 방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유진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실제 동백은 노력보다 공격형이긴 하지만.
우리의 노장 흰눈은 어른답게 폭력은 사양하면서 끊임없이 쉬지 않고 유진에게 자신을 어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