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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없는 여행_홍콩2026 본문

아주 오랜만에 홍콩 여행 일정을 잡았다. 젊은 날 내 낭만적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홍콩 영화였기에, 처음으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벗어나 방문 한 곳 역시 홍콩이었다. 재건축 지역에서 길고양이를 이주시키고 돌보기를 거의 십 년 가까이 활동하다 보니 여행이 소원해지고 홍콩 여행도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다. 다시 여행 일정을 잡으며 고민 없이 홍콩을 여행지로 삼은 것은 역시나 추억 때문이다. 낯선 것에 설레고,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고 향했던 처음 여행의 감각을 다시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꾸준하고 강도 높으며 반복되는 일상을 살고 있다는 뜻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런 삶이 불만이지는 않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규칙 있는 생활이 주저앉고 싶거나 나태해지는 마음을 다잡는데 도움이 되었고, 힘든 일이 생겨 마음이 무너질 때도 규칙적인 식사가 건강을 잃지 않게 하는 것처럼 내 마음의 건강을 지켜주는 밥 같은 의미가 되어주었다.
나는 평소 삶을 지루하게 느끼지 않는 편이다. 책을 읽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로라를 보고 온 것만큼의 황홀경에 빠지는 사람인지라 꼭 낯선 어딘가로 향해야 한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다. 그런 점이 문제였을까. 공항에서 내가 탈 비행기를 내려다보면서도 저 비행기가 어떤 비행기인지 설명을 들을 때까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물론 설명을 듣고서도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비행기에 장시간 탑승이 어렵다. 폐소공포증이 있고, 실제 비행기 안에서 죽을 것 같을 때 머릿 속에서 비행기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만큼 위험한 순간도 있었기 때문에 3~4시간이 넘는 비행거리는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의 내 컨디션은 그럭저럭 피곤하지 않은 상태여야 해서 보통 자고 일어난 상태로 비행기를 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최대한 마일리지를 빡빡 긁어모아 비즈니스석을 이용하는 편이다. 비행기가 이륙하면 의자를 젖히고 그냥 자는 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홍콩행 비행기는 1층과 2층으로 나뉜 꽤 규모가 큰 비행기라는 설명, 그래서 날개에 엔진이 각각 두 개씩 달려있는 흔치 않은 대형 비행기라는 설명, 혹시나 엔진 하나가 고장 나도 대체 엔진이 세 개나 된다는 설명을 듣고 고개만 끄덕였다. 여행에 많은 의미를 두고 사는 사람은 저런 것도 관심을 갖는구나 하면서.
매년 홍콩 여행을 하는 동생은 이제 관광지 훑듯 돌아다니는 여행을 하지 않는다. 홍콩 거리를 걷다가 보이는 작은 커피숍에 들어가 뜻하지 않게 먹게된 에그타르트가 맛있어 더는 관광이 아니라 거리 산책하다가 동네 작은 커피숍에 들르는 주민처럼 몇 가지 음미하고 돌아오는 여행으로 전환했다. 사실 그런 방식의 여행이면 나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에 이번 여행에 끼어들었는데, 자꾸만 일정 계획을 세우고 내 의향을 묻는 동생이 의심스러워졌다. 그러나 이미 탑승 직전이었고 삼박사일의 일정 동안 동생의 계획을 무산시키려는 나의 노력이 싸움으로 번지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비행기에 탑승해 자리를 잡고 이륙하기를 기다렸다. 완전히 이륙하기 전까지는 의자를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야하니까. 승무원이 기내식 나올 때 자고 있으면 깨워도 되냐고 묻기에 그래달라고 부탁하고 사선으로 기울어진 비행기가 평행이 되기를 기다렸다. 비행기 안에서 치러야 할 의식들이 모두 처리될 때쯤엔 비행기도 안전한 궤도에 올라섰고 나는 바로 담요를 덮고 잠을 청했다. 몸을 길게 펼칠 수 있는 비즈니스석을 이용할 때마다 반대 상황에 갇혔던 날이 떠오른다. 도쿄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였는데 오후 늦은 비행기였고, 오전에 무리해서 도심 관광을 한 탓에 비행기를 탔을 때는 이미 녹초가 된 상태였다. 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들어 올리거나 펼쳐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런 공간이 허락되지 않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연착되는 바람에 한 시간을 더 상공에 떠있어야 한다는 안내 방송을 듣는 순간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폭죽 터지듯 머릿속에서 폭발했고, 내 시선은 저절로 비행기 문으로 향해 저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날 이후로 더는 이코노미 좌석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무리해서라도 비즈니스석을 찾는 것에 경제적 압박을 느낄 때마다 강력한 변명이 되어주는 사건이 되었다.
펼쳐진 의자에 누워 과거의 나를 떠올리니 절로 몸서리가 쳐져서 잠을 재촉했다. 새벽에 일어난 탓에 졸린 기운이 남아있어 쉽게 잠들었는데 이륙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기내식이 나왔고 깨워달라는 내 부탁대로 승무원은 자신이 직접 내 자리의 접이식 테이블을 펼치는 것으로 나의 잠을 깨웠다. 미리 정해둔 식사 메뉴는 감바스였는데 점점 육식에 거리를 두게 되는 나의 식성에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게 새우라는 생각에 주문했다. 새우 하나를 입에 넣었다가 바로 후회했다. 너무 맛이 없어서 그냥 자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내식을 치우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더는 잠이 오질 않아 창밖을 보며 이번 여행의 목적을 생각해 봤다.
처음 홍콩 여행을 나섰을 때는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 여행 안내서를 길잡이 삼고 지도를 펼쳐 동서남북을 헤아리며 다녔다. 그래서 많이 걷고 긴장하고 조심스러웠다. 배탈도 나서 별 수 없이 맥도날드 햄버거로 배를 채우기도 했고,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서 마시기도 하고.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헤매는 시간들이 두려우면서도, 한 번 갔던 길을 두 번 가게 될 때 느껴지는 익숙함에 꽤나 행복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는 이미 이런 두려움이 사라졌다.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 많은 것이 편해졌다. 말은 번역기로 해결할 수 있고, 위치는 구글 지도로 알 수 있고, 지도에서 주요 핫스폿 검색과 이용방법, 별점 평가까지 나와있어 도대체 두려워해야 할 틈이 없다. 즉 모험이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편의 시설을 다른 도시에 가서도 볼 수 있기에 낯선 느낌은 쉽게 익숙한 상표로 덮여버린다.
비즈니스 좌석을 필요로 할만큼 나는 여행에 대해 긴장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몇 번의 여행이 더해지면서 낯선 곳에 내렸을 때의 걱정보다 협소한 공간에서 느낄 답답함과 불편함이 더 크다면 세상 어딜 가도 설렐 일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비행기 안에서 다음 일을 걱정하기보다 지금의 몸 상태에 더 집중한다는 것은 이미 이번 여행에서도 처음 여행을 떠나며 느꼈던 설렘 따윈 없는 것이다. 차리리 뭘 보겠다거나, 뭘 먹어야겠다거나 하는 분명한 목표라도 있으면 나았으려나.
목적 없는 여행은 혼자일 때는 상관 없지만 동행인이 있을 때는 달라진다. 서로의 기대치가 다르면 흥이 깨지기 쉽다. 그런데도 이번 여행에 끼어든 것은 격변의 시기를 겪은 홍콩은 내가 알던 홍콩에서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그냥 이곳저곳 걷다 보면 풍경과 사람이 얽혀있는 모습에서 뭔가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게 있긴 했다. 그러니 더더욱 나는 동행인이 원하는 여행 경로 안에서 조용히 내 기대감을 채워야 하기에 다투지 않을 만큼 양보하는 자세를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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