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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dhandhan 2014. 6. 23. 22:18

아침에 일어나서 세탁기 상태부터 확인했다. 세탁물이 담겨 있으면 얼른 해치우고 겨울 옷들을 세탁해야 하기 때문에. 다행이 비워있었다. 옷장 문을 열어 겨울 옷들 중에 물빨래를 해야 하는 옷들을 골라냈다. 몇 해를 입어온 옷들이라 더는 비용을 들이며 세탁소로 보내야 하는 옷들은 거의 없었다. 세탁기에 물을 받고, 세제를 풀고, 겨울 옷들을 집어 넣었다. 세탁 15, 헹굼 3, 탈수 5분의 설정을 맞추고 모든 일을 세탁기에게 넘겼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바케스에 담아 놓았던 어제의 생리대를 빨기 시작했다. 빨래비누의 위력은 합성세제보다 강력하다. 핏물을 왠만히 제거한 후 빨래비누를 바르고 물통에 넣어두고 하루 정도 지나면 말끔해진다. 그러면 생리대를 몇 번 헹군 후, 다시 통에 담아 삶는다. 그럼 완벽하다. 다시 새하얀 생리대가 탄생한다. 어제의 흔적은 모두 지워져 나간다. 그렇게 생리대는 매달 반복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내게 남아있는 흔적은 아무리 씻어도 잘 지워지지가 않는다. 이상하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냄비 하나가 올려져 있다. 뚜껑을 열어보니 북어국이다. 그릇에 북어국을 담고, 밥을 얹었다. 수저로 꾹꾹 누르며 밥과 국을 뒤섞었다. 김치를 꺼내 밥 한 숟가락, 김치 한 젓가락 입 속으로 구겨 넣었다. 맛도 모르고 먹는다. 팔이 기계처럼 퍼 나르면 입은 반사적으로 열고 닫는다. 멍하게 반복한다. 반복의 사이에 다른 무엇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열심히 반복한다. 그 사이 세탁기는 세탁을 끝내고 첫 번째 헹굼으로 들어섰다. 세탁기 통 속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우렁차다. 나는 우렁차게 울지 못한다. 세차게 회전하며 더러워진 물을 밖으로 뽑아낸다. 나는 그런 세찬 힘이 없다. 세탁기는 어떤 불순한 동작 없이 헹구고 탈수 하기를 반복한다. 정확히 세 번을. 나는 자꾸 빈틈이 생긴다.

 

말끔해진 생리대와 섬유유연제 향기를 풀풀 날리는 겨울 옷들은 볕 좋은 곳에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잡는다. 거기에 내 자리는 없다. 볕은 내 눈물에 자리를 잡는데 내가 설 곳은 없다. 내가 설 수 있다고 생각한 자리는 어제 사라졌다.

 

빠닥해진 걸레를 물에 적셨다. 비틀어 짰다. 무릎을 끓었다. 속죄하듯이. 팔을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흔들며 걸레질을 했다. 머리를 주억거리며. 눈치 없음을 비난했다. 예민하지 못함을 질책했다. 나로 인해 아파했음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대충 묻어버린 나는 죄를 뉘우치며 주억주억거렸다. 또 걸레를 빨았다. 빛나는 빨래비누를 바르고 문지르고, 문지르고 헹구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레를 널었다.

 

봄 옷과 여름 옷들을 보관함에서 꺼냈다. 옷장에 하나씩 걸으며 지난 해에 입었었던 옷과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을 구분했다. 대체로 입지 않는 옷들은 격식을 갖추는 옷들이다. 내 삶에 특별히 격식을 갖추는 일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년에 입지 않은 옷들은 올해도 입지 않을 것 같다. 입지 않을 것 같은 옷들을 바라보며 버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고민만 했다. 고민하면서 내 손은 그 옷들을 옷장 속으로 집어넣었다. 언제고 입을 날이 온다면 격하게 입어주리라. 언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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