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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단상 본문
12살 때의 일이다. 영문도 모른 채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낡은 5층짜리 아파트 맨 꼭대기까지 한달음에 튀어 올라가는 아빠를 따라 온 가족이 숨을 헐떡이며 올랐다. 증조할머니의 죽음, 그것이 온 식구를 정신줄 흐리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이 내 생애 처음으로 접한 인간의 죽음이었다.
증조할머니는 바른 자세로, 항상 주무시던 자리에, 깊이 잠든 듯 누워 계셨다. 고모할머니는 자신의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울먹이며 누워계시는 증조할머니의 허리춤에 손을 몇 번이고 집어 넣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증조할머니는 더는 이승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듯 자신의 허리 밑으로 쑤시고 들어오는 딸의 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문간에 서서 어른들의 행동, 주고 받는 얘기를 주섬주섬 들으며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죽음은 무섭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다. 죽은 사람은 ‘전설의 고향’ 처럼 내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평온한 얼굴은 오히려 죽음을 통해 드디어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맞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 생각을 그 어린 나이에 했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첫 번째 경험의 강렬한 이미지가 사후적으로 시간을 들여 해석한 결론이다. 그래서 내게 죽음은 슬픔으로 다가와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나 역시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이유로 내 곁을 떠나가는 일이 많아짐을 의미한다.
운전을 맡은 동생과 엄마 그리고 나는 자유로를 달리고 있었다. 오락가락하는 비로 창문을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며, 아무 생각 없이 전방을 주시하며 앞으로 보게 될 할아버지의 모습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 채. 우리는 M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할아버지가 입원해있는 병실로 향했다. 그 사이 난 고민했다. 평소 왕래가 뜸한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하니 막상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싹싹하게 대하기엔 우린 너무 사이가 멀었다. 그러나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눈 앞에 할아버지를 맞닥트리자 고민은 헛일이 되어버렸다. 반쯤 벌어진 입 속에 치아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뼈와 가죽으로 지탱하는 몸뚱이, 벌어진 콧구멍으로는 지금의 삶을 연명하기 위한 최소한의 양분이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숨소리, 그 소리가 아니라면 죽음 그 자체인듯한 모습의 할아버지는 밤새 뒤척이시다가 잠든 지 얼마 안되었다고 간병인이 말했다.
잠시 잠에서 깬 듯 눈을 뜬 할아버지에게 엄마는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보기에도 탁해서 저 눈으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싶은 두 눈은 허공을 휘휘 저었다가 이내 감아버렸다. 이제 할아버지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 하시는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오락가락하며 자신의 삶을 정리하시는 중이시리라. 우리는 우리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간병인에게서 할아버지의 근황을 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근래 할아버지와 밤낮을 같이하고 있으니까.
“밤새 안주무세요, 뭐라고 뭐라고 혼잣말을 많이 하시는데 저승사자가 보이나 봐요.”
“저승사자요?”
엄마가 되묻는다.
“아직, 내가 기운이 없어서 못 일어나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라고 말하시더라고요.”
“그런가 보네요.”
엄마는 간병인의 말에 답하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또 누구씨, 누구씨 하면서 사람을 부르는데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젊어서 좋아했던 사람을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 나 보고는 아줌마라고 부르시더니 이젠 나를 보면서 자네도 많이 늙었네 하시지 않겠어요.”
우리 세 사람은 간병인의 얘기에 집중한다. 할아버지의 유언은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모습이니까.
“밤에 하도 안주무시니까 제가 피곤해서 간호사한테 부탁을 했어요. 할아버지 주무시게 할 수 없겠냐고. 그랬더니 간호사가 할아버지는 잠자는 약 쓰면 안 된다네요. 그러면 그냥 가버리신다고…”
클림트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클림트’가 생각났다. 그 영화는 클림트가 죽기 직전 병상에 누워 투병 중인 모습으로 시작한다. 병상에 누워 삶과 죽음을 오가는 클림트가 자신의 과거를 비연대기적으로 회상하는 방식의 영화로 기억한다.
할아버지도 자신의 삶을 그렇게 기억해내고, 말 걸고, 의미를 정리하는 중이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환자들을 간병해왔는데 많이들 아파해요. 살에 조금만 자극이 와도 소스라치게 아파하고. 근데 딱 죽을 때가 오면 하나도 안 아파해요. 할아버지는 아직 아프다고 애기해요. 여기저기.”
고통은 정말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그것이 마음이건 몸이건. 아프지 않으면, 아프지 않은 순간이 오면 삶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죽어버린 삶을 바라는 것일까.
할아버지를 사투의 시간에 남겨 놓고 우리 세 사람은 병실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한 주의 피로를 못 이겨 흘러넘치는 고통을 주체 못하고 졸았다.
잠시나마 생각해 본다. 죽음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삶의 반대 급부로서 두려워해야 할 순간인가. 아니면 신이 내려준 유일한 지복의 순간인가. 죽음에 직면하지 못한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살아있는 삶의 의미가 죽음의 의미를 정의할 것이라는 사실을.
지금 아픈 것은 사랑하고 있다는, 살아 있다는 증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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