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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자와 비흡연자 사이에서

dhandhan 2015. 3. 17. 22:56

담뱃값 인상으로 한동안 말이 많았다. 흡연자들 사이에서는 서민 등쳐먹는 정부라며 정책을 비판했고, 비흡연자들은 흡연자들 때문에 원치 않는 간접흡연에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할 없다고, 건강에도 좋은 담배 끊으면 된다고 질타했다. 건강을 생각하면 끊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렇게 끊기 쉬운 담배였다면 이렇게 많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각종 중독 물질의 결합체인 담배, 그것에 길들여진 흡연자들은 담배의 노예다. 사람을 중독 시켜 놓고서 이제와 끊으면 된다고 말하는 정책이 올바른 정책인지 모르겠다. 담뱃값 인상은 국민의 건강을 생각하는 높으신 분들의 염려가 아니라 분명히 세수를 확보하기 위한 정책인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보편적인 세금 징수처럼 보이지만 절대적으로 서민에게 불리한, 서민 증세이다. 담뱃값은 동일하다. 부자가 사든 가난한 사람이 사든 말이다. 내야 하는 세금도 동일하다. 19세기 프랑스 혁명기에 농민의 지지율을 가늠하는 정책 중에 하나가 주세(酒稅)였다. 어떤 술이든 동일한 세금을 적용했기 때문에 싸구려 술을 마시는 하층민이나 고급술을 마시는 귀족들이나 같은 금액의 세금을 내야했다. 당연히 돈이 없는 하층민은 술을 마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국가가 하층민 건강 생각해서 모든 술에 동일한 세금을 매겼을 없다. 농민의 지지가 필요할 주세를 폐지했다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면 제일 먼저 작동시키는 것이 주세였다. 담뱃값 인상도 다르지 않다. 결국 담배 끊는 사람 별로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단지 초반에 담배 판매량이 감소할 것이라는 약간의 위험만 감수하면 안전하게 확보되는 서민 증세.

 

현재 나는 비흡연자다. 비흡연자로서 제일 괴로울 때는 길거리를 다니면서 맡게 되는 담배 연기다. 담뱃값 인상과 맞물려 진행되는 음식점 흡연 금지 조치로 인해 모든 흡연자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여기저기 온통 길거리는 담배 타는 냄새투성이다. 짜증난다. 흡연자를 피했나 싶으면 어디선가 담배냄새가 흘러온다. 비흡연자 입장에서 흡연자의 담배 피우는 냄새 또는 담배 피운 후의 담배 찌든 냄새는 그들의 면상에 바로 토할 있을 같게 한다.

그런데 나도 한때 흡연자였다. 17년을 흡연자로 올해로 6 비흡연자로. 정확히는 흡연자와 비흡연자 사이에 있는 존재다. 흡연을 했던 사람이 완전히 비흡연자로 돌아서기엔 담배의 유혹이 강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피워야 비흡연자라고 말한다. 그러니 나는 사이에 있는 맞는 같다. 그리고 비흡연자로 보내온 6 시간에 아예 피웠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유혹에 이겨 피웠던 것도 아니다. 금연을 시작한 이후 담배 냄새가 좋았던 적은 없다. 다만 흡연자들 속에 껴있게 되면, 그러니까 나만 비흡연자일 경우 때문에 모두가 금연모드로 돌아설 없기 때문에 내가 일시적으로 흡연모드로 돌아서는 것이다. 일시적인 흡연 모드는 좋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흡연자일 때보다 목이 아파 고생을 했으니까. 그래서 점점 흡연자들 모임은 피하게 되고, 비흡연자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흡연자를 편드는 것도 비흡연자의 고충을 얘기하는 것도, 사실 양측에 있어봤기 때문에 이해되는 지점이 있다.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비흡연자로 생활하면서는 솔직히 흡연자가 불편한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퀵서비스 아저씨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는 순간 불만을 말하는 것이 투정처럼 여겨지는 느낌이었다.

헬멧을 오토바이 안장에 앉아 있는 아저씨의 모습은 오토바이가 주는 날쌔고 거친 느낌과는 달랐다. 리어카를 끄는 노인처럼 구부정해진 , 얼굴의 주름진 결은 그가 이미 60세를 훌쩍 넘어섰음을 보여주었다. 담배를 엄지와 검지 손가락 끝으로 잡아챈 모습이 담배를 꽁초가 되도록 피울 모양인 했다. 그의 시선은 땅의 바로 어디쯤에 고정한 . 그의 눈과 그가 바라보는 어느 지점 사이에는 그의 근심이 맴돌고 있었다. 근심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등을 달팽이 껍질처럼 말아치우는 근심이 있다는 사실과 근심의 근원을 알지 못하는 자의 자기 위로가 사실은 자기 학대인 담배 개비라는 사실. 알면서도 피우는 담배.

그에게 밥값에 맞먹는 담뱃값의 의미는 사장님이 피우는 담배하고는 분명 다르다.

 

2009 11 1일에 담배를 끊었다. 오랜 흡연습관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쉽게 담배를 떨쳐낼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기에 자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사고방식, 인간관계, 생활패턴, 사소한 습관까지 있는 자신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지 않으면 된다는 고민의 시기였고, 스스로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하나가 흡연 습관이었다. 분명 중독되어 있었고, 습관적으로 마음이 괴로울 담배를 피우며 내뱉는 연기 속에 괴로움을 흘려보냈다. 흘려보내고만 있었던 것이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감히 괴로움의 근원을 알려고 하지 않으니 없는 것들 대한 불안은 더욱 나를 담배에 묶어두었다. 나아가 그런 태도는 단순히 흡연습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없고, 어떠한 관계도 좋은 관계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담배를 끊는 일은 내게 아주 중차대한 일이 수밖에 없었다. 금연이 상징하는 바는 내가 더는 온당하지 않은 어떤 관계나 순간에 미련하게 끌려가지 않을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한낱 연기에 근심을 날려버렸다는 헛된 망상에 더는 빠져있고 싶지 않았다. 흡연습관을 차치하더라도 생활방식을 꼼꼼히 살펴보면 우리가 얼마나 부당한 것들에 의심하거나 되묻지 않고 사는지 모른다. 그런 내가 괴로웠다. 느낌으로는 아닌데 아니라고 말할 있는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 죄로 먹은 벙어리처럼 담배연기에 매달려 살았다. 당시의 자기혐오는 금단증세보다 강했다. 덕에 금연은 (대체로)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도 니코틴과 알코올에 의지해있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살면서 번은 독립된 인간이 되어봐야 하는 아니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