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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효도나 하라는 당신에게 본문
무지한 확신이 뱉어내는 칼날 같은 문장들
골목길 낮은 구석, 작은 플라스틱 그릇에 조심스레 사료를 채우는 이들을 향해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꽂히고는 합니다. 때로는 혀를 챡 차는 소리가, 때로는 날 선 목소리가 적막한 공기를 가릅니다. 인터넷 공간으로 눈을 돌리면 그 공격성은 한층 더 잔인하고 노골적인 문장으로 변모합니다. 수많은 비아냥 중에서도 유독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고 들어와 먹먹한 잔상을 남기는 댓글이 있습니다.
“그 정성으로 부모에게 효도나 해라.” “지 부모 처지는 생각도 안 하고 미물한테 돈 쓰고 시간 쓰네.”
이 짧은 문장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가정이 자애롭고 따뜻한 울타리이며, 모든 부모가 자식을 사랑으로 품어 안았을 것이라는 안일하고 오만한 확신을 전제로 합니다. 그들에게 ‘가정’이란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는 아늑한 안식처이자 도덕의 출발점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소중한 울타리를 외면한 채 길 위의 미물에게 마음을 쏟는 행동은 불효이자 일탈, 혹은 일종의 정신적 사치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굳게 믿고 있는 그 정상가족의 신화 이면에는, 누군가에게는 집이 곧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학대의 현장이자 생존을 위협받는 연옥이라는 잔인한 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그 말 속에는, 부모가 부모의 노릇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도리어 자식의 영혼과 신체를 짓밟는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차가운 실태에 대한 무지와 외면이 깔려 있습니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저 역시 가정폭력의 피해자로서 그 무지한 비아냥의 실상을 짚어내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불효의 증거’라 낙인찍은 길고양이의 밥자리가, 실상은 누군가에게는 무너진 삶을 간신히 지탱하는 마지막 생명줄이자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였다는 사실을, 당사자의 목소리를 통해 전하고자 합니다.
활동가들의 다양한 스펙트럼,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취약한 이들
물론 길 위에서 밥을 차리는 수많은 활동가가 모두 같은 사연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생명에 대한 순수한 책임감과 동물권에 대한 선진적인 인식으로 묵묵히 활동을 이어갑니다. 캣맘과 캣대디의 서사는 저마다 다르며, 이를 하나의 틀로 규정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오류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엄중하게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평범해 보이는 활동가들의 스펙트럼 속에 차마 자신의 비극을 세상에 밝히지 못한 채 숨죽여 고양이를 돌보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가정폭력의 피해를 겪은 이들의 이야기를 깊이 들여다보면, 폭력이 단순히 신체적 상해를 입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가해자들은 대개 피해자의 인간관계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주변과의 소통을 철저히 차단합니다. 친정 식구, 오랜 친구, 이웃 주민들까지 모든 사회적 유대관계가 공포와 감시 속에서 끊어져 나갔을 때, 피해자들에게 남는 것은 완벽한 고립입니다. 세상에 내 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절망감,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거나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는 깊은 무력감이 매일 밤 영혼을 잠식해 들어가는 지옥 같은 상황입니다.
이처럼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는 감옥 같은 일상에서, 가해자의 감시망을 피해 쓰레기를 버리러 가거나 잠시 숨을 돌리러 나온 뒷골목은 피해자들에게 유일한 도피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길목에서 마주치는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길고양이들은, 피해자들에게 기묘한 동질감과 구원으로 다가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유해동물이라며 쫓기고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어디 한 곳 하소연할 곳 없이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길고양이의 처지가, 방금 전까지 집안 구석에서 웅크린 채 폭력을 견뎌내야 했던 자신의 신세와 너무나도 똑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구원할 방법은 당장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 눈앞에 있는, 나만큼이나 상처받고 굶주린 저 작은 생명만큼은 이 밤에 배를 주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가 그곳에서 싹튼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주머니에 작은 캔 하나, 사료 한 줌을 챙겨 밤거리를 나서는 행동은 여유로운 자의 시혜나 적선이 아닙니다. 나보다 더 약한 존재를 돌보고 책임을 지는 그 행위를 통해, 피해자들은 폭력으로 갈기갈기 찢겨 나갔던 내면의 주체성과 존재 가치를 비로소 다시 확인받게 됩니다.
“세상 모두가 나를 쓸모없다고 말하고 짓밟아도, 저 아이들에게는 지금 내가 세상의 전부이구나.” “내가 살아있어야 이 아이들도 내일 밥을 먹고 살아갈 수 있겠구나.”
실제 현장에서 만난 많은 피해 여성이 고백하듯, 무너진 자존감의 바닥에서 길고양이를 돌보는 일은 “너도 살아라, 나도 살겠다”며 벼랑 끝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는 가장 처절한 생존 연대입니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던 이들이 다시 삶의 의지를 다지고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역설적이게도 그 길 위의 작은 생명들이 건넨 대가 없는 온기 덕분이었습니다. 모든 캣맘이 피해자는 아닐지라도, 어떤 피해자들에게 길고양이 돌봄은 생존 그 자체였던 셈입니다.
반려동물을 인질 삼는 가정폭력의 실태
대중들은 흔히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향해 쉽게 말합니다. “그렇게 힘들고 위험하면 당장 집을 나와서 경찰에 신고하고 쉼터로 도망치면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탈출하지 못하고 폭력의 굴레에 머물러 있는 피해자들을 답답해하거나, 심지어 유약하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장의 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발목을 붙잡아 매는 잔인하고 거대한 족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살아온 ‘반려동물’의 안위입니다.
가정 내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폭력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동물을 인질로 활용합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거나 집을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면, 가해자는 동물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거나 죽이겠다는 위협을 일삼습니다.
실제로 동물권행동 카라(KARA) 등 국내외 동물권 단체와 여성인권 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가정폭력이 발생하는 가구의 반려동물 학대 동반율은 매우 치명적인 수준으로 나타납니다. 여성을 학대하는 가해자가 가정 내 반려동물 또한 학대한다는 유의미한 현장 보고들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학대 피해 여성의 절반가량이 자신의 반려동물 역시 동일한 가해자로부터 위협을 받거나, 신체적 상처를 입거나, 실제로 살해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합니다.
가해자에게 동물 학대는 단순한 화풀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피해자에게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음 차례는 저 동물이며, 결국 그다음은 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극단적인 심리적 통제 수단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려동물은 가해자의 폭력성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방패막이가 되는 동시에, 피해자가 집을 나가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인질이 됩니다.
실제 사례 중에는 온몸에 피멍이 들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상습적인 폭행을 당하면서도 여성긴급전화나 보호시설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 피해 여성이 있었습니다. “내가 집을 비우면 남겨진 고양이들을 남편이 굶겨 죽이거나 때려죽일 것이 뻔하다”는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내 몸 하나 살리겠다고 자신을 유일하게 위로해 주던 반려묘들을 지옥 같은 가해자의 손아귀에 던져두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결국 많은 피해자가 동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대피를 포기하거나 미루다가, 가해자로부터 더 치명적이고 치사율이 높은 폭력에 노출되는 악순환을 겪고 있습니다.
동반 입소 불가의 벽과 가정 회귀의 악순환
이처럼 반려동물이 인질이 된 상황에서 피해자가 결단을 내리고 도망치려 해도,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여전히 차갑고 비좁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다수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쉼터)은 구조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동생활의 특성, 다른 입소자들의 알레르기나 공포증, 위생 및 안전 관리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반려동물의 동반 입소를 원칙적으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현장의 비극은 이미 여러 언론 보도를 통해 고스란히 증명되었습니다.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반려묘들을 기르던 한 가정폭력 피해자는 고양이들을 안전하게 맡길 곳을 찾지 못해 보호시설 입소를 계속해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물을 두고 갈 수도, 데려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대피가 지체되었고, 그 사이 가해자의 폭력은 더욱 잔인해졌습니다. 당장 몸을 숨겨야 하는 긴급한 순간에도 동물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은 피해자에게 잔인한 선택을 강요합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폭력의 현장을 탈출해 쉼터 문턱까지 도달했다가도 발길을 돌리는 사례가 부지기수입니다. 중앙일보의 보도 중 현장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 해에도 수십 명의 피해자가 쉼터에 반려동물과 함께 입소할 수 있는지 절박하게 문의해 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행 제도상 동반 입소가 불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은 상담 피해자들 중 상당수가 결국 입소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고 다시 폭력의 가정이 있는 집으로 회귀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경인일보 등의 보도에서도 "반려동물이 족쇄가 되어 보호시설 입소를 포기하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이중고"를 심층적으로 고발한 바 있습니다. 인프라와 제도의 미비로 인해, 피해자는 가해자의 폭력뿐만 아니라 '동물을 유기하거나 방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죄책감이라는 이중의 고통에 시야가 가로막힙니다. 결국 이 사회가 동반 입소라는 선택지를 주지 않음으로써, 피해자들을 다시 폭력의 온상으로 밀어 넣고 있는 셈입니다.
함께 살기 위한 변화와 캠페인
다행히도 최근 이러한 현장의 비극과 이중 고충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피해자와 반려동물 모두를 안전하게 구하기 위한 움직임이 지자체와 민간 단체를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동물을 구하는 것이 곧 사람을 구하는 길"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가장 먼저 앞장선 곳은 일부 지자체들의 시범 사업입니다. 부산광역시는 전국 최초로 여성폭력 피해자가 반려동물과 분리되지 않고 함께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기존의 피해자 지원시설 중 일부 호실을 '반려동물 동반 입소 가능 공간'으로 지정하여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서울시와 경기도 등지에서는 동반 입소가 당장 어렵더라도, 피해자가 시설에 머무는 기간 동안 지자체 지정 동물보호센터나 위탁소에서 반려동물을 무상으로 장기 임시 보호(최대 7개월)해 주는 연계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한 방에서 서로를 안아줄 수 있는 전용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매우 뜻깊은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로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를 개소했던 '한국여성의전화'는 쉼터 개소 40주년을 맞이하여, 현장에서 반려동물 때문에 탈출을 주저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국내 최초 반려동물 동반 입소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 건립 프로젝트]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https://happybean.naver.com/donation/rdonaboxes/H200000008146/story?p=p&s=rsch
반려동물과 함께, 가정폭력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국내 최초, 반려동물 동반 입소가 가능한 가정폭력 쉼터
happybean.naver.com
이 캠페인은 좋은 시설 하나 올리는 건설 사업 그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가해자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동물을 해방하고, 그 동물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온몸으로 폭력을 받아내야 했던 피해 여성들에게 '더 이상 소중한 존재를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주는 존엄성의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폭력으로 무너진 사람과 동물이 한 공간에서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온전한 자립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가장 실질적이고 따뜻한 연대의 손길입니다.
비난의 화살이 가리켜야 할 곳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행위를 보며 “그 정성으로 부모에게 효도나 하라”고 쉽게 뱉어내던 이들에게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길 위의 활동가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비아냥은, 대다수 선량한 활동가들의 순수한 생명 존중 지향을 모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에 숨어 간신히 삶의 끈을 붙잡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비상구마저 폐쇄해 버리는 잔인한 언사입니다. 모든 캣맘이 가정폭력의 피해자는 아닐지라도, “효도나 하라”며 던지는 무심한 칼날 같은 언어는 가정폭력이라는 거대한 재난 속에서 동물을 돌보며 간신히 살아갈 이유를 찾고 있는 이들의 가슴에 가장 먼저 꽂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가정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았던 이들에게 길 위의 생명은 불효의 증거가 아니라, 세상에 던진 처절한 구원의 몸짓이었습니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이들의 삶 속에는 이처럼 세상이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각자의 서사와, 때로는 가장 아픈 사회적 실태가 녹아있기도 합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에게 반려동물과 길고양이는 가슴아픈 댓글을 다는 사람들과는 절대 같은 의미일 수 없습니다. 가장 어두운 밤을 함께 버텨내 준 유일한 가족이자, 살아갈 이유를 안겨준 은인들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들이 동물의 안전 때문에 대피를 포기하고 다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비극은 끝나야 하고, 자신의 위험을 감수 하며 길 위의 생명을 지키는 마음을 지켜줘야 합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추진하는 동반 입소 쉼터 건립 캠페인 같은 변화들이 더 널리 알려지고 사회적 지지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생명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가장 약한 생명을 안전하게 품어줄 수 있는 사회라야 비로소 그 속의 인간도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어느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숨을 죽인 채 밥자리를 찾고 있을 길고양이들과, 그 고양이의 밥을 챙기며 간신히 자신의 눈물을 닦아내고 있을 누군가의 숨겨진 상처를 생각합니다. 그 정성으로 효도나 하라는 무지한 비난 대신, 벼랑 끝에 선 두 존재가 서로의 손을 잡고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따뜻한 연대의 시선이 우리 사회에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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