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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하는 몸 - 치욕이 진화하는 방식에 대하여 본문

《사람의 일, 고양이의 일》을 출간하면서 많이 아쉬웠던 지점 중 하나가 어떤 감정의 흐름과 그 감정이 축적되는 것에 대한 표현을 시도했으나 끝내 편집 과정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감정을 다루기 위한 공부가 덜 되어 있었고, 그에 따른 표현의 언어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었고,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한 자료를 찾는 데 수년의 시간을 들여야 했다.
길고양이의 삶을 관찰하면서 나는 고양이들이 갖는 감정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나의 호의를 받으면서도 끝내 곁을 주지 않는 삶의 태도를 보면서 그들이 나를 비롯한 다양한 인간들과 접하면서 겪는 경험의 모습을 상상해야 했다. 매일 떠오르는 길고양이 학대 소식은 우리 주변에 동물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고,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과 그런 행위를 방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특정인의 호의만으로 고양이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에는 고양이에게 인간은 몹시 위험한 대상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 어쩌다 사람에게 곁을 준 고양이는 쉽게 학대의 대상이 되거나 살해를 당하거나 그도 아니면 중성화 수술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고양이 개체의 건강과 안전한 삶을 위해 중성화 수술을 시키고 먹이를 공급한다고 꼭 우리의 행동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일련의 보호라는 명목의 행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우리는 누군가를 보호할 때 역으로 그들의 자유나 역량을 제한한다는 사실이다. 고로 길고양이의 삶을 지원하는 행위나 학대하는 행위 모두에는 기본적으로 그들을 약자의 위치에 두고 있으며, 그 위치를 개선하기보다는 시혜적으로 대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태도에서 길고양이는 어떤 감정을 느낄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러한 고양이의 위치에 나를 대입하는 상상을 해보는 일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인간 사회에서 나의 약자성으로 겪어야 했던 보호 행위가 어떻게 나의 역량과 가능성을 제한하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의 기저에는 치욕이라는 감정이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치욕은 개인 안에서 완결되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시선과 집단적 기준, 그리고 그 기준으로부터의 추락이 만나는 자리에서 발생한다. 무인도에 혼자 있는 사람은 치욕을 느낄 수 없다. 치욕은 관계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치욕은 개인적인 감정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감정을 가지고 있다. 좋고 나쁨에 대한 감정은 그 생명체가 살아가면서 정해야 할 행동의 방향을 정한다. 때문에 먹고 자고 싸고 성욕을 해소하는 일 모두의 방향을 정하는 것 역시 감정이다. 그런데 이런 좋고 나쁨의 감정을 넘어서는 감정들이 있다. 우애, 전우애, 애국심, 치욕, 모욕 같은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을 정동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감정이 개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정동은 관계와 장 안에서 흐르는 힘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때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몰려나와 집단적으로 축구를 응원했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들끓는 애국심, 4강 진출이라는 자부심이 대규모 응원장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 되었다. 개체 안에서는 흥분되는 신체 반응과 기쁨이라는 감정이었겠지만, 사회적으로는 거대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자부심의 형태를 띠었다. 평소 축구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그 거리에 나오는 순간 함께 웃고 소리를 질렀다. 개인의 기존 감정과 무관하게 장 자체가 사람을 변용시킨 것이다. 이것이 정동이다.
이런 집단적인 감정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 보면 감정 역시 진화해 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초기 인류에서 지금의 인류까지 이어오는 시간 동안 인간 종에도 어떤 유전적 변화와, 그런 변화를 이끌어온 감정적 진화 과정이 서로 상관하며 변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인간 주변에서 인간에게 지대하게 영향을 받는 동물에게도 어떤 감정이 새롭게 유발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예를 들면 공장식 축산장에 갇혀 사는 동물들의 신체 억압이 그들에게 어떤 부정적 감정을 지속적으로 유발하고 있다면. 평생 갇혀 강제 출산과 강제 수유 과정을 통해 착취만 당하다 늙어서 도살당하기 직전에 구출된 젖소들이 초원에 방목되는 순간 좋아서 춤을 추듯 뛰어다니던 영상은, 그들에게 비교 상황이 없다 하더라도, 풀을 밟아보는 일이 처음이라 하더라도, 무엇이 더 나은 삶이고 어떤 경험이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 세간을 시끄럽게 했던 늑구의 탈출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동물원에서 태어난 늑구에게 비교 경험이 없음에도 늑구는 동물원에 갇혀있는 삶은 나쁜 것이라는 감정을 품었을 가능성이 높다. 평생 제 몸 하나 뉘일 정도의 스툴에 갇혀 사는 돼지는 어떨까. 깊은 우울감과 절망감, 그리고 저항하거나 탈출할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가 태어난 자식들을 방치하는 사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감정과 정동을 구분함으로 인해서 동물에게 감정은 있을 수 있어도, 정동이라는 지극히 사회적인 관계의 장 안에서 만들어지는 힘은 동물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반론에도 불구하고 동물에게 관계의 힘이 만들어낸 집단적인 감정을 길고양이에게 대입하려는 이유는, 유독 한국의 길고양이가 보이는 인간에 대한 깊은 경계심을 달리 해석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경계심 이면에는 인간과 만들어온 관계의 힘 때문에 생긴 감정의 파고가 들어차 있지 않을까.
진화라는 용어를 쓰면 마치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상이 존재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으니 이쯤에서 명확히 해야겠다. 진화란 그저 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인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동물들은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절망인지 체념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나는 치욕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낫지. 그런데 산 목숨 끊는 게 어려워 그 감정을 밑으로 눌렀다 차올랐다를 반복하는 삶을 꾸역꾸역 사는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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