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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놈놈-만약에 세상이 망하면 본문
한참 좀비물이 유행할 때 한 번쯤 세상이 망했을 때를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할 때면 어김없이 걱정되는 존재가 우리 삼냥이다. 세상이 좀비로 물결치면 어떻게 저 셋을 데리고 피난을 갈까. 게다가 나는 저질 체력에 허리 디스크와 족저근막염까지 달고 사는 사람인데. 그런 현실적인 걱정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이동장에 고양이 셋을 어떻게 담을지 계획 세워봤다. 배낭에는 제일 무거운 동백이 담고, 어깨 끈이 있는 가방에는 유진이, 그리고 가장 가벼운 흰눈이를 손잡이가 있는 이동장에 담아야지. 담는 것까지는 하지만 셋 합해 20kg에 육박하는 무게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뭐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하다 보면 피난이 답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피난할 수 없다면 ‘집이 방호막이 되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냥 헛웃음이 쏟아졌다. 뭐 하나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니 좀비가 쳐들어올 때까지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공포에 떨며 도망 다니느니 마지막까지 마음 편하게 말이다.

좀비물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그려지는 것은 바로 좀비가 사랑했던 가족을 죽이는 것과 사랑한 가족이 좀비가 되어 죽여야 하는 순일 것이다. 내가 좀비에게 물려서 좀비가 되고 우리 냥이들을 잡아먹어버리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위험 직전에 스스로 살길을 도모할 수 있게 풀어줘야 하는 게 아닌지 하는 고민도 든다. 풀어준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집에서만 살던 고양이들이 풀어준다고 살 수 있을까. 사실 이건 망국의 시대까지 갈 필요도 없다. 지금같이 평안한 시대에도 유기된 고양이의 생존율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생존율을 고민하다보니 셋 중에 누가 가장 생존율이 높을까 비교해 보게 되었다. 순위를 매기자면 단연 1위는 흰눈이다. 평생 길에서 살았고 싸움과 타협의 스킬도 갖고 있으니 잠시 집에서 살았다 해도 밖에 나가는 순간 몸에 베인 감각이 살아나고 정보를 탐색하는 능력은 흰눈이가 가장 앞설 것이다. 다만 이미 나이가 많아 체력적으로 불리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다음은 동백이지 않을까. 여전히 집에서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영역을 확인하는 활동은 동백만 하고 있다. 방방마다 돌아가며 시간을 정해 잠을 잔다. 밤엔 내 방에서 아침부터 정오까지는 안방에서, 오후엔 동생방에서. 마치 이 집 모든 곳이 자신의 영역임을 증명하려는듯 말이다. 그러니 밖에 나가서도 영역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가장 많이 하려고 노력할 타입인데 문제는 셋 중에서 가장 겁이 많다. 매일 집에서 흰눈과 유진에게 힘을 과시하려 하는데 흰눈은 엉겨 붙는 자식 대하듯 봐주고, 유진은 원래 다 내 거라는 왕족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서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동백이 선을 넘는다 생각하면 가차 없이 공격한다. 그럴 때면 한 것 부푼 꼬리를 뒷다리 사이로 말아 넣고 도망가는 동백이를 볼 수 있는데 겁 많으면서 허세도 만만치 않은 게 동백이다.

제일 걱정스러운 건 유진이다. 생의 전부를 집에서만 살았기에 바깥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응석받이로 키워서 잠투정도 심하다. 사회성 결여로 동백이 흰눈이 모두 싫어한다. 밥도 좋아하는 것 줄 때까지 안 먹고 버티는 성향이라 입맛도 까다롭다. 뭐 하나 바깥에서 적응 못할 것 같은 타입인데 가끔 현관문이 열리면 셋 중에 가장 호기심을 보이며 문 밖으로 나서는 건 유진이뿐이다. 겁은 좀 없는 편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흰눈이가 유진이를 무척 좋아한다. 유진이가 사람에게 하는 말을 듣고 흰눈이가 반응하고 유진의 요구를 자신이 들어주려고 하는 일이 많다. 다만 유진이 원하질 않는다. 때로는 흰눈을 야멸차게 대하는 유진의 차가운 태도에 내가 다 민망한데 흰눈이 아랑곳 안 한다. 흰눈의 유진에 대한 애정은 자식에 대한 무한한 애정 같기도 하다.
만약 정말 인류가 망하는 날이 오면 흰눈이, 동백이, 유진이 셋이 꼭 붙어 다녔으면 좋겠다. 흰눈의 경험과 지혜, 유진의 겁 없는 왕족 같은 태도, 영역을 다지는 동백의 집요함이면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위험이 없어서 서로의 소중함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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